고등학교 때 개봉했을 때부터 이 영화를 얼마나 많이 봤는지 모르겠다. 신기하게도 매번 볼 때마다 이 영화가 주는 느낌은 달랐다. 그 때 그 때 내가 느끼는 감정들 때문에 받는 메세지가 달랐다. 한 번은 썸머를 욕하기도, 또 한 번은 톰을 욕하고 자책하기도 했다. 전엔 자아의 성장이란 면에서 톰과 썸머를 둘 다 긍정하면서 이 영화를 한 동안 보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톰이 뭘 잘못했는지에 맞추어 영화를 다시 보게 됐다.
회의 때 표정이 이런 직원도 생산성만 좋다면 천조국에선 잘리지 않나보다...
톰은 스스로를 배반하는 삶을 산다. 대학 시절 건축을 전공했지만, 생계를 위해 카드 만드는 회사에 다닌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대신 표현해주는 카드를 만든다. 본인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니 열정도 없고 흥미도 없다. 그러던 중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썸머라는 새로운 비서였다. 그러나 그는 썸머에게 섣불리 다가가지도 못한다. 썸머가 그에게 다가오고 나서도 그녀에게 제대로 관심 있다는 표현도 못하는 바보가 톰이다. 심지어 그는 썸머가 진지한 관계를 원치 않는다고 말하고 나서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물론 썸머의 해석이 아무리 엉성하다고 해도, 톰의 표정을 보시라.
썸머가 손까지 쓰면서 설명하는데 톰은 저 표정 저 딱딱한 자세 그대로다!
영화 속에서 톰이 했던 실수는 썸머에게 새로운 세계도 확신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먼저, 톰은 썸머와 새로운 즐거움들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지 않았다. 썸머가 전시회에서 작품을 열심히 해석하려고 노력하는데 반해, 톰은 전혀 노력조차 해주지 않는다. 물론 썸머도 전시를 보는 걸 어려워하긴 하지만, 그녀는 톰의 호응이 없어도 열심히 작품을 해석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그녀에게 톰은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한다. 이런 장면은 전시회 장면 말고도 음반 및 비디오 대여점에서의 링고스타의 LP판, 이케아 데이트에서도 반복되는 톰의 모습에서도 이어진다. 썸머는 톰에게서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볼 수가 없었다.
믿거나 말거나 이 두 커플은 방금 전까지 웃고 있었다. <졸업>은 욕망 뿐인 기성세대에 반항하는 청춘을 그리지만
광기 속의 청춘도 결국 현실을 직시하고 만다.
톰이 썸머에게 확신을 못 준 것은 썸머가 결국 영화 <졸업>을 보고 나서 우는 장면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바에서 덩치와 싸운 뒤 이어지는 둘의 갈등에서 역시 드러나긴 하지만, 이 영화 전체의 해석에 있어 70년대 영화 <졸업>은 가장 중요한 알레고리다. 영화 <졸업>은 처음 시작에서부터 내레이터는 톰이 영화 <졸업>을 잘못 이해했다고 지적하는데, 이는 “일레인, 일레인!”이라고 외치는 더스티 호프먼을 보고 비현실적인 로맨스를 꿈꾸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둘이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을 때도 톰은 여전히 같은 감흥을 받았을 것이다.
톰은 썸머의 눈물의 의미를 눈치채지 못한다.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썸머의 감정은 이렇게 끝나버렸다.
그러나 썸머는 달랐다. 마지막 장면에서 둘이 타는 스쿨버스 안에는 청춘의 열병이 어떻게 차갑게 식는지 보인다. <졸업>의 엔딩 장면에서 사랑하는 여자를 결혼식장에서 데리고 나온 더스티 호프먼은 곧 차갑게 표정이 식는다. 자신이 한 짓이 얼마나 광기에 의한 것인지 직감한 것이다. 그 둘에겐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서로에 대한 열정으로 넘쳐나지만, 함께 있으면 더 힘들어지는 두 사람. 영화를 보면서 썸머가 흘린 눈물은 여주인공의 삶을 꼬아버리는 더스티 호프먼보다 박력 없는 톰과 만나고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고작 자신과의 관계만이 낙이지만 본인이 원하는 것은 진지한 관계라고 표현도 증명도 못하는 톰에 대한 미안함과 갑갑함이 결합된 복잡한 심경 때문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처음 기대와 현실 장면이 시작할 때 시차가 나는 것까지, 볼 때 마다 표현이 섬세한 걸 보고 놀란다.
톰의 관점, 썸머의 관점으로 보는 시도는 결국 무용하다. 서로 안 맞았다고 말하기에도, 원래 맞는 사람은 없다. 영화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결국 표현의 문제다. 표현 안 하면 소통이 이뤄질 수가 없고 서로 상처만 남고 끝날 뿐이다. 말로는 쉽지만 용기를 내는 건 또 다른 문제다. 그러나 소중한 것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우리는 그것을 소중히 다루지 않았음을 진심으로 후회한다. 톰에겐 춤을 추자는 썸머에게 물을 기회가 있었고 곧 파티에 초대된다. 그러나 그는 헛된 기대만 품고 안 좋은 현실을 봤을 뿐이다. 썸머는 후에 자신에게 무슨 책을 읽고 있냐며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를 궁금해했던 남자와 결혼한다.
이것 만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묶을 수 있는 관계 따윈 없다. 그저 순간 순간의 낭만과, 지속적인 감정의 공유가 가능한 관계들을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작에서부터 말하듯, 애초에 이 영화는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톰이 직장을 관두면서 말하는 것처럼 ‘사랑’이란 특정한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 판타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둘 사이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공유는 현실적인 것이고, 우리는 자신과 상대방만이 아는 언어로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기까지는 용기와 솔직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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