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만명.
자극의 홍수 속에 사는 시대에, 숫자로 들어서는 아우슈비츠에서의 학살의 잔혹성이든, 왜 우리가 이 사건을 잊지 말아야 하는지 체감하기 어렵다. 그러나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이 둘을 감각하게 해주는 너무나 강력한 계몽적 성취를 이뤄냈다.

단 수십 초를 위한 105분
카메라는 시종일관 루돌프 회스 중령과 그 가족들을 조금 먼 거리에서 비춘다. 온실도 가꾸고 물놀이도 하면서 평화롭게 전원생활을 하는 듯 하지만, 그들의 집은 수용소 담벼락 바로 옆에 있다. 회스 중령은 아우슈비츠 소장이고 아내는 이 생활을 정말 만족해하며 친정어머니를 초대해 자랑한다.
회스 중령 가족에게 수용소에서의 잔혹한 폭력은 일상이기에 이 가족의 평온함은 역겹다. 수용소에 끌려온 유대인들에서 보석과 옷가지를 빼앗은 일은 부인들 모임에서 시시껄렁한 소재가 되고, 짜증 나는 일이 있을 때에 가정부에게 살해 협박은 일상적이다. 어린 아들은 총소리에 밖을 내다보고 ‘다음엔 말 잘 들어’하며 커튼을 닫는다. 잔혹함이 일상화된 이곳을 비추는 영화는 우리를 철저한 관찰자의 위치로 내몰아 등장인물들은 공감받지 못한다.
영화를 보는 105분 내내 카메라는 우리는 인물들의 표정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인물 위주의 서사에 익숙한 내게 영화가 요구하는 집중을 유지하는 것은 답답하고 힘들게 느껴졌다. 벽 너머론 오직 시체를 태우는 연기만 보이고, 벽 바깥의 그 인물들도 멀리 있어 귀를 쫑긋 세우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귀를 채우는 비명소리와 총소리, 그리고 마치 유리를 쇠로 긁는 듯한 삽입 음악은 회스 중령 가족의 모습과 대조되며 일상적 역겨움을 더한다.
그러나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회스 중령이 헛구역질을 하며 계단을 내려오고 현재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비춘 1분이 안 되는 시간.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 그 수없이 많은 신발을 전시해 놓은 복도를 비추는 순간 105분 내내 느껴온 역겨움은, 순식간에 소름 끼치도록 잔혹한 대규모 학살에 대한 충격으로 바뀐다.

학살은 합리적이고도 너무나 근대적이었다.
학살자 루돌프 회스 중령은 가족에 충실한 ‘평범한’ 가장이다. 그저 시스템이 문제인가?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인가? 가끔 우리는 인류의 위대함의 증거였던 근대적 이성의 발전이나 합리적 사고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양차대전과 유태인 학살은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의 지극히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선택들이 모인 결과였을지 모른다.
일상적으로 잔혹한 수용소 수준에서 소름 끼치는 인류사적 공간이 된 것은 아마도 루돌프 회스 중령에게 닥친 전출명령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의 가족은 수용소 담벼락 바로 옆 사택에서의 생활을 너무나 사랑했다. 아내는 전출을 따라갈 수가 없다고 하여, 회스 중령은 후임 소장에게 부탁하여 가족은 사택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처음에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강가에서 카누를 타다 곧 뼈 조각을 발견하고 박박 씻기는 모습은 최소한의 염치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역시도 되돌아오기 위해 그가 가장 수용소 운영에 적합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이 성실한 가장은 수용소를 가장 잘 알고 있었고, 업무처리도 능숙했다. 영화 도입부에 방산업체로의 시체 대량처리방안을 처음 듣고, 검토 후에는 전화로 후속 특허 등록을 논의한다. 전출된 후에는 그는 아우슈비츠 운영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회스 작전을 수립하고, 수십만 명의 헝가리의 유태인들을 수용소로 보내는 작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되고 곧 소장 복귀가 결정된다.
회스 작전으로 큰 인정을 받은 날, 회스는 파티에 가는데 그는 연회장에서 사람들에게 축하받지 않고 층고가 높은 연회장을 관망할 수 있는 테라스에서 생각에 잠긴다. 연회가 끝난 후 늦은 저녁 아내에게 그는 말한다. “층고가 높아서 이 많은 사람들을 처리하는 것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새 전쟁이 끝나면 농사를 짓고 살겠다던 회스 중령은, 가족과 계속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인류역사상 최악의 학살극이 시작된다. 개인 차원의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들이 모인 결과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야만적인 결과를 낳는다. 홀로코스트의 소름 끼치는 대규모 학살은 지극히 합리적인 방식으로 이뤄졌고 우리는 이를 근대성의 연속성으로 이해해야지 단순 일탈로 봐선 안 된다.
영화가 끝나고도 그 몇 초 동안 느낀 충격은 잘 지워지지 않았다. 아마 이렇게 충격적인 영화는 당분간 만나기 어려울 것 같다. 시각과 청각이 빚어내는 영화적 경험이 중요한 영화이기에, 내려가기 전에 반드시 영화관에서 시청하길 권한다. 영화매체 고유의 특성이 메시지까지 함의하여 형식과 내용이 서로 조응하여 감각적 경험과 이성적 이해를 모두 강화시키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너무나 강렬한 계몽적 성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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