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피에르 다르도, 크리스티앙 라발, 피에르 소베트르, 오 게강
- 출판
- 원더박스
- 출판일
- 2024.02.29
책을 아예 안 읽은 사람보다, 책 한 권 읽은 사람이 더 무섭다. 하이에크를 존경한다던 검사 출신의 지배자는 뉴라이트라 불리는 이들을 끌어들이고, 친-부자(친기업도 아니다), 반노동, 반-민주주의, 반공몰이, 사법정치로 일관했다. 급기야 계엄이라는 비상대권까지 행사했는데, 그가 하이에크를 존경한다고 한 건 단순 우연인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과연 철지난 언제적 신자유주의인가?
나아가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신자유주의의 수명은 끝났다는 말이 많았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그에 앞서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적어도 지난 30여년 동안 사회과학 분과에서는 전지구적으로 금융화 심화, 노동 및 사회연대 약화, 자유무역 확대와 더불어 각 국의 시장질서 표준화와 그 제도에 맞는 주체화 등의 현상을 비판적으로 포착하기 위해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을 자주 써왔다. 그러나 용례가 다양했던 만큼 개념은 다소 모호하다. 정책 패키지인가? 80년대 이전 자본주의 호황기 이후 새로운 국면인가? 대체 이 개념을 쓸 땐 무엇을 포착하고자 하는 것인가?
“신자유주의는 통치전략이다”
『내전, 대중혐오, 법치』의 저자들은 신자유주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신자유주의는 통치전략으로 이에 기반해 거의 지난 반세기 동안 수행되어 왔고 현재에도 진행 중인 정치적 변화를 설명하고자 시도한다. 정치적, 경제적 전략, 더 주요하게는 경제적 목표의 관철을 위한 광범위한 영역에서 전개되는 정치적 전략으로 본다. 즉, 체제가 아니라 1980년대 이후 ‘개인’과 소비자 주권보장을 전제로 한 시장경쟁을 위한 전지구적 우파의 통치술이라는 의미다.
신자유주의의 정치적 전략은 시장질서를 ‘만들기’ 위해 이에 방해되는 사회적 연대를 파괴하고 ‘사법(私法)국가’를 수립하려는 정치적 의지다. ‘주권국가’를 통한 집산주의적 기획에 대항한 이 과두정치세력의 투쟁 방법은 국민 일부의 적극적 지지에 힘입어 다른 국민 일부를 상대로 벌이는 ‘내전’이다.
대중 민주주의를 혐오한 신자유주의 시장질서의 아버지들
저자들은 신자유주의의 사상적 배경을 1973년 칠레에서의 쿠데타 기획에 사상적 뒷받침을 하거나 열렬한 지지를 보낸 루이 루지에, 월터 리프먼, 폰 미제스, 하이에크, 뢰프케 등의 학자들에게서 찾는다. 그들 사상의 본질은 자유주의가 아닌 대중혐오에 있다. 20세기 전반부터 일찍이 대중의 어리석음과 민주주의가 (자신들이 재발명한) 자유주의를 위협하는 진정한 위험이라고 보았다. 그 귀결은 대중과 민주주의가 접근할 수 없는 권력기관을 세우는 통치전략이다.
자유시장이란 시장의 법적 규범화를 통해 구축해야 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선 강한국가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하이에크는 칼 슈미트의 유산 물려받아 규칙에 의한 통치를 주장했다. 소득과 분배를 바로잡으려는 민주주의의 시도를 저지해야한다는 것이다. 미제스는 ‘신’-자유주의의 창시자로 고전적 자유주의를 사적소유권 중심으로 급진적으로 재정의했다. 미제스는 20세기 초 좌파 대중운동을 ‘자유주의’의 적으로 인식했으며, 지적∙도덕적 유산을 가진 나라에서 존재하는 파시즘이 자유주의를 지켜낼 거라고 믿었다. (그는 오스트리아 파시스트 운동에 참여한 전적이 있다)
자유시장을 위한 구체적인 수단으로는 대의 민주주의에 기반한 ‘법치’를 전유가 필요했다. 하이에크는 집단적인 의지를 제어하고 사법(私法)을 헌법화하는 제도를 꿈꿨다. 바로 법률에 대한 해석을 넘어 입법부의 입법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는, 대의기구 밖에 있는 특별법원의 설립이다. 비상임기구에 진정한 ‘주권자’의 역할을 맡기는 것이다. 이를 통해 민주주의가 불평등을 이유로 자원을 비인격적 시장 메커니즘에 의해서만 분배하는 자유시장을 파괴하는 것을 항구적으로 막아낼 수 있다.
보수주의, 내전, 권위주의
군대를 동원한 쿠데타가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니기에, 이에 수반해 일부 대중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문화정치가 동원됐다. 뢰프케에게 신자유주의는 근대화로 파괴된 공동체에 개인을 재통합시키는 보수주의적 전략적 대안이다. 그는 자본주의의 사회적, 도덕적 해악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반발을 전통적 가치와 제도, 가부장제, 권위, 순응주의에 대한 인민계급의 애착을 통해 무력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장과 사적소유, 전통적 도덕의 수호자라로서 서는 노선을 택한 것이다. 신자유주의 정부들은 전통과 국가의 수호자이자 개인의 자유의 옹호자를 자처해왔다. 반동적 우파들은 국민 정체성을 재정의하는 작업을 진행해왔고, 이민자와 무슬림에 대한 혐오를 유발하고 보수주의적 복음주의(신앙생활 통해 내세의 구원과 현세에서 부, 건강, 연애의 성공을 약속)로 종교의 역할을 다져왔다.
나아가 우익의 포퓰리즘 전략에도 ‘전유’된 법치가 이용되어 왔다. 우익 포퓰리즘의 전략은 하나의 국민 정체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로 분할하는 데 있다. 인민 일부가 사회연대, 노동권에 등을 돌리게 만들고 다른 인구집단을 적으로 삼도록 증오를 부추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예시로는 비상대권을 형법에 통합시키는 형태의 테러방지법을 통해 일반화된 인구 감시 통해서 위험한 소수를 구분하고 분쇄하는 전략이 있다. 법적 질서 중단 없이도 영구적인 예외 상태를 만드는 것이다. 법치국가는 신자유주의에 의해 전유되어, 합법성에서 질서가 나오는 것이 아닌 법이 앞서 언급했던 ‘품행’규칙이 되어버린다. 브라질 등 국가에서 벌어진 정적의 피선거권을 박탈하는 수단도 동원됐다.
가장 기대했던 극우 포퓰리즘 분석에서 저자들은 파시즘과는 구분을 두고, 최근의 극우운동을 권위주의적 자유주의로 바라본다. 파시즘은 모든 개인을 단일한 인민 공동체로 구성하고자 했지만, 신자유주의는 개인을 우위에 두어 완전한 예속을 거부한다. 오히려 자유주의를 경제질서의 문제로 국한하여, 협의를 무시하고 권력을 집중화하고자 하는 목표를 갖고 있다는 데에 가장 큰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대내용 정치철학인가?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신자유주의의 ‘정치철학’의 관점에서 잘 정리됐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논의의 대상을 신자유주의의 ‘정치철학’으로 한정하고 이에 기반한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고 그 사상적 본질은 대중혐오에, 전략적 기술의 핵심은 내전에 있다. 전반적으로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도 많이 설명해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짚고 넘어갈 점들이 있다.
먼저, 신자유주의는 정말 한 국가만에서의, 정치철학만의 문제인가? 자본의 국제적 이동을 자유화시킨, 구체적으로는 금융자본의 이동 자유화와 공급망 질서라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질서도 동시에 생각해야 한다. 이런 견지에서 단지 트럼프 등장은 월가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실천에서만 바라볼 수 없다. 적어도 셰일가스 혁명 이전, 미국이 석유를 적극 수입하고 경상수지 적자국으로 국제 무역질서의 버팀목으로 기능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에도 아프가니스탄전은 911 테러에 대한 보복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뒤이은 이라크전은 석유전쟁의 혐의가 짙다.
그 가운데 중국이 산업화를 완성해나고 패권국가 미국의 자리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트럼프 행정부 1기 이전에도 오바마 행정부 2기부터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제조 르네상스’를 시작했다. 리쇼어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중국의 ‘중국제조 2030’을 막아서기 시작했다. 즉, 자본이동의 국제질서에 제국이 뒤로 빠져있던 시기가 지나 다시 제국이 전면으로 나선 것이다.
요컨대 자본주의의 한 국면으로서 신자유주의 개념을 포기는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국제질서 재편과 금융화를 독립적인 현상으로 취급하거나 ‘주체화’의 측면에서만 논의하는 것은 불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동시대에 일어난 중요한 현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저자들이 주장하는 신자유주의는 아직 유효하고 끝나지 않은 전략이라는 주장의 당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서부지법의 폭도들은 파시스트일까?
이 책이 던지는 또 다른 화두인, 현대의 극우운동은 파시즘이 아닌 권위주의적 자유주의라는 주장에 대해선 잠정적으로는 동의할 수 있다. 파시즘의 본질 자체도 매우 논쟁적인 사안이며, 프랑스의 극우정치 연구자 케빈 패스모어도 A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의 『파시즘』 개정판에서 결국 정의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 시기의 극우운동으로 정의했다. 다양한 정의들에 관한 논의가 각자의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설명이 안 되는 핵심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급진적인 극우주의 운동 일반은 국민국가 내부에서의 적대를 본질적 요소로 갖고 있으며, 좌파에 적대적이었으며 민족 공동체의 목적 달성에 대한 열망이 컸다는 점 정도는 합의할 수 있을 것이다. (전체주의자들은 파시즘 vs 자유주의와 같은 도식을 주장하지만 미제스와 같이 자유주의를 볼셰비키로부터 지키겠다며 파시즘에 가담한 사람들을 보면 성립한다고 볼 수도 없다) 물론 동아시아 3국은 모두 권위주의적 정부, 강한 민족 정체성, 지정학적 공간에서 서로에 대한 뿌리깊은 적대를 최근까지 경험하고 있기에, 현실의 급진적인 극우주의 운동은 유사-파시즘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경계할 수 있다고 한다.
한국 사회에서 최근의 극우 세력의 폭동과 정치세력화 양상을 분석하고자 한다면, 한국 우파들이 담론을 수입하는 미국의 극우주의, 대안우파 운동은 물론, 한국 사회에서의 극우운동의 역사적 변천을 살펴보는 한편, 한국의 권위주의 독재 경험과 신자유주의, 개신교 복음주의 교회들의 역사, 국가와 언론의 영향 하에 온라인 커뮤니티 담론형성, 그 담론을 이어 받은 정치인들로 이어지는 역사적 분석이 필요할 듯 하다.
비판이야 비판이지만, 지금의 시국을 이해하는데 많은 인사이트를 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2007년 금융위기 이후 불평등은 다시 화두에 올랐다. ‘강성 사회당원’이 된 피케티의 『21세기의 자본』의 돌풍은 한국에 사회적 불평등과 노동이라는 문제의식을 남겼다. 그 동안 두 명의 대통령은 과거 민주주의와 인권이 탄압받던 시절의 트라우마를 새로 끌어들임과 동시에, 그와 동시에 우리 사회에서 불평등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닌 것처럼 격렬한 내전을 수행해왔다. 결국 한국의 민주주의는 그 둘 다 심판대에 올려놓는데 성공했지만 여전히 새로운 것은 보이지 않는다.
좀처럼 출구가 보이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그럴수록 더 열심히 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책에서는 신자유주의의 수단으로서 법치를 소개했지만, 법치주의야 말로 민주주의와 함께 가는 근대 시민혁명의 유산이다. 마냥 현실의 법치를 가치-중립적으로 볼 수는 없지만, 어쩌면 여기서 공동체를 지키는 일을 시작할 수도 있겠다는 몇년 전의 생각이 맞는 방향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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