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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s

김유원, <불펜의 시간>: 평범한 모욕의 시대에 건내는 작지만 단단한 위로

by 양자역학이 좋아 2021. 10. 3.

 

휴가 가기 전 날 홧김에주문한 <불펜의 시간>을 다 읽는데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책 뒤편에 써진 이 투박한 문구에 마음이 이끌렸다. 휴가에 돌아와서는 단숨에 읽었다. 평소에 소설 좋아하지도 않고, 야구를 좋아하지 않음에도 읽는 데 힘이 들지 않았다.

 

<불펜의 시간>생존주의사회에 사는 세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준삼, 혁오, 기현. 준삼은 야구선수를 포기하고 평범하게 살아가기로 한 직장인, 혁오는 어릴 적 트라우마로 볼넷을 던지는 투수, 기현은 여자이기에 프로 야구선수가 되지 못한 스포츠신문 기자다. 준삼은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혁오는 진호리그와 정규리그를 함께 뛰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기현은 스포츠신문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각자가 겪는 삶은 모욕적이다. 준삼은 평범한 삶을 위해 여직원을 밟고 올라가야 하고, 또 입사동기의 민주노조 탈퇴와 어용노조 가입을 종용해야 한다. 혁오는 야구를 계속하기 위해, 8회에는 환상적인 투구를 하고 9회에는 볼넷을 던지며 야유를 받는다. 그의 아름다운 폼에 비하면 그가 계투에서 펼치는 기량은 한줌도 되지 않는다. 기현은 스포츠신문사에서 여자로서 살아남기 위해 주변의 폄하를 못들은 채 하고 살아가야 한다.

 

주인공들은 모욕적 삶을 거부하지만, 모욕적인 생존투쟁을 피하기 위해 그들이 택할 수 있는 서사는 아예 더 주변부로 도망가는 것뿐이다. 준삼은 회사를 관둔다. 혁오는 기현과의 인터뷰를 통해 정면으로 자신의 철학을 이야기하지만, 돌아오는 건 야유와 제명이라는 불명예다. 기현은 SNS에서나 글을 쓸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준삼과 기현이 혁오를 보며 생존이 아닌 아름다움을 위한 행동도 있을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미약하게나마 연대의 정서가 보이긴 하지만, ‘희망의 감각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가장 위로가 된 문장은 금융 협동조합에서 일하는 기현의 친구 새롬이 무심코 던진 기현의 내가 돈 낼게하는 말에 한 멀다는 대답이다. 그의 말처럼 평범한 것도 꿈꿀 수 없는 시대에는, 작지만 단단한 걸 만드는 것이야 말로 희망의 원천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