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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s

앨프리즈 W. 크로스비, <수량화 혁명>: 측정가능하다는 믿음의 기원

by 양자역학이 좋아 2021. 10. 4.

근대에 이르러 서구문명이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된 원인은 자연과학과 기술, 그리고 무기다. 그러한 배경에는 종교나, 철학 등 서구 근대문화가 달성한 업적들도 있었겠지만, 아시아와 남아메리카의 중앙집권제 국가들보다 월등한 생산력과 파괴력, 그리고 지배력을 갖출 수 있었던 까닭은 정량적 사고.

 

앨프리드 W. 크로스비의 <수량화 혁명>은 서구문명에서 양적실재가 질적실재를 대체하고, 나아가 양적인 변형을 일으키기 위한 기술을 발전시켜온 역사를 다룬다. 책은 결론 격인 3부를 제외하고, 수량화와 시각화 두 부로 나뉘는데, 1부에서는 측량과 표준화 등을 통해 수량적 사고가 자리잡아 근대 수량화 혁명의 기초가 쌓이는 필요조건들을 다루는 한편 2부에서는 그러한 사고들이 구체적으로 시각화라는 방법을 통해 과학기술로 발전할 수 있었던 충분조건들을 다룬다.

 

수치화된 실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선, 실재가 고로 균질하게 일정 단위로 측정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측정된 개체들을 모아 일정한 추상적 범주로 분류하고, 평균 등의 통계값을 구하여 실재를 인식한다. 서구문명은 수학과 계측을 연결하였고, 시간과 공간을 균질적으로 분절하여 사고함으로써 실재를 변형시키는 데에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이러한 수치화된 실재 이전의 유서깊은 모델(Venerable Model)은 상징을 중심으로 실재를 인식했다. 그 근거는 역사적으로, 또 신학적으로 명백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인들은 시간과 공간을 수치적으로 정확히 인식하기보다는, 다른 기준과의 상대적 차이를 통해 인식했다.(A로부터 n일 후/BC 뒤 등) 이러한 까닭은 개략적인 인상을 중시하는 성향도 될 수 있지만, 명확하고 간단한 사칙연산의 표현수단 자체가 불가했다는 데에도 있다.

이러한 유서깊은 모델은 봉건사회에 도시가 생기고, 대학이 생기면서 빠른 속도로 새로운 모델로 대체되어 간다. 정확도와 물리적 현상의 수량화, 수학을 강조하는 새로운 모델은 복잡해지는 중세사회에서 중요해진 명료함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킨다. 중세대학의 스콜라 학자들은 사물을 수량화하여 파악하는 데 관심을 가졌는데, 이는 곧 사물의 경제적 가치의 양화인 화폐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를 낳는다. 시공간 역시 각각 연속적인 흐름에서 분절적인 등질체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양적으로 정확하게파악되기 시작하였고, 결정적으로 수학의 발달이 새로운 모델의 지배를 만든다. 서유럽에서 수학은 인도-아라비아 숫자의 연산법과 숫자를 통해 사물의 특성을 명료하게 구체화하여 인식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여담으로, 수학의 선험성은 신비주의를 타파하긴커녕 숫자와 천체법칙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로 나아간다)

 

새로운 모델이 유서 깊은 모델을 대체하는 수량화의 과정이 필요하지만 충분하지는 않았던조건이었던 반면, 시각화는 충분 조건이었다. 가장 먼저 서구인들은 이제 띄어쓰기가 된 글을 소리내지 않고 읽기 시작했다. 기억에 의지해 부르던 성가도 악보로 시간의 흐름과 음의 높낮이를 정량적으로 기록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회화 역시 의미의 크기에서 원근법과 기하학을 도입하였고, 회계에서도 복식부기가 발전하여 계산을 통해 수량적인 정확성을 학습했다.

 

이러한 수량화와 시각화, 정확히 말하자면 실재의 정량적 인식과 정량적 인식의 시각적 재현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일까? 서론에서 나왔던 전쟁에서 일정 수의 보병이 동질적인 보폭으로 걷는 것과 같이, 대규모의 물량을 조직된 형태로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거대한 시계에 하나의 부품처럼 맞아 떨어져 요구되는 속도로 움직이는 근대사회의 힘은 바로 정량적 인식과 그 시각적 재현을 통해 반복 가능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 극단이, 멈출 줄 몰랐던 서구문명이 스스로를 뒤돌아보게 했던 나치였다. 나치를 돌연변이가 아닌 과학주의의 극단으로 바라볼 때, 이전의 모든 윤리들을 과학의 이름으로 수정했고 합리화하여 실천했다. 근대 이후 인류사의 가장 큰 재앙 중 하나인 유태인 학살을 이성적으로 뒷받침한 것도 민족별 신체 특징 등을 비교해온 우생학이다. 만약, 나치를 해프닝이 아닌 서구문명을 그 근원으로 하는 체제로 반성한다면, 이러한 정량적 사고에 대한 맹신 역시 검토되어야 한다.

 

회사원인 내게 있어서 내 '노동'에 관한 흥미로운 문화사 책이기도 했다. 이과생으로 수능을 보고 공대생으로 살다 Engineer 명함을 받게 된 후, 내가 회사에서 하는 일은 사실 숫자 맞추는 일이다 숫자 안 맞으면 얼마나 안 맞는지 확인하고, 왜 안 맞는지 분석하고, 일단 넘길 수 있는지 판단도 한다. 그리고 사실 그 숫자는 자연과학적 추론에 입각하기보다는 이전 data와 비교하여 용인 가능한지 수량화된품질 기준에 맞춰 처리된다.(그 기준은 대개 임의적으로 지정되고 평가 후 승인되는 절차를 밟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자연과학이나 공학 그 자체보다 실제 기술적 실천에는 아직도 정량적 사고그 자체가 더 중요하다고 느껴진다.

덧붙여 원제 "The Measure of Reality"는 너무 훌륭한 작명이라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