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건대, 나는 정신분석학에 관한 개념을 잘 모른다. 제대로 된 입문서 한 권 읽은 적은 한 번도 없거니와, 사회구조의 심층에 대한 분석에 정신분석학적 개념은 자리할 곳은 없고, 크게 의미있는 분석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반면, 현상으로서 사회를 뒤덮는 감정들에 대해서는 ‘사회적 평균’ 내지는 ‘전체로서 사회’의 감정구조를 진단하는 것은 의미가 있으며, 그것을 읽어내는 것이 문화분석의 영역에서 정신분석학이 빛나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문화/과학에 실린 정강산의 「자본주의구조위기의 리비도 형세: ‘암울한 세대’ 너머의 감정사를 향하여」는, 그런 의미에서 ‘청년’으로 호명되는 집단이 드러내는 징후들에 대한 가장 탁월한 분석이며 동시에 현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제시한다.
위기가 이토록 암울한 이유는 위기 때문이 아니다
정강산은 단지 작금의 위기를 ‘질 좋은 일자리의 부족’이나 ‘노동환경의 열악화’ 정도로 포착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오히려 그는 이를 자본주의 특유의 “주기적 경기 순환이 후퇴∙수축기에 빚어낸 산물”이자 “신자유주의 단계 자본주의가 직면한 구조적 위기가 주체에 각인되는 양상”으로 포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암울한 세대’는 “자본주의 구조적 위기를 직접 겪었거나 그 여파 속에서 성장기를 보낸” 이들이기 때문.
오히려 이 ‘암울한 세대’는 자본주의의 지속가능성의 실패이자 리비도를 에로스의 상태로 견인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그는 ‘암울한 세대’로 호명되는 나이대의 이들에게 관찰되는 나르시시즘, 우울, 죽음충동을 포착한다. 성애적 관계에 대한 무관심, 자식에게 투사된 나르시시즘은 구조 위기에서 취할 수 있는 “자기 보존을 위해 취해진 합리적인 선택지”이다. 반대 면에는 나르시시즘을 선택하지 않은 이들의 자학과 그로 인한 ‘자아상실’로서 나타는 우울증이 있다. 리비도가 자기 자신만을 향하고 있을 때, 서로를 타자로 경험하는 혐오가 만연한, 공동체의 위기가 등장한다. 여기에 마침표를 찍는 것은 “유토피아적 전망 혹은 미래의 상실”이다.
그래서 그는 에로스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인간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확장하고 연대하는 ‘삶의 충동’, ‘우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역사적으로 오래된 에로스의 기능이었고 금시대의 우리 사회엔 에로스가 부재한다. 에로스의 재건을 위해서 낙관적인 전망이 필요하다는 것이 논문의 주장이다.
‘디스토피아’는 상상하지마!, ‘긍정적 사고’의 이면
‘세대론’ 등장 이후에 이런저런 해결책들이 제안되었지만, 정말 원인에 접근하는 대안이 나온 적이 있었던가? 초기에 청년담론은 주로 탈정치화된 대학생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짱돌 던질 배짱도 없었던’ 소위 ‘88만원 세대’는 IMF 시기에 학창시절을 보냈던 신자유주의의 구조적 위기를 겪은 첫 세대다. 그 이후 젊은 세대들이 자주 이용했던 커뮤니티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와 평등주의에 세례를 받은 ‘사상’과 그리고 냉소주의였다. 현실정치는 끊임없이 청년을 호명하며 ‘청년 정치인’을 기용해왔지만, 비전은 존재하지 않았고 청년 정치인들도 인터넷 커뮤니티의 냉소를 대변할 뿐이었다.
냉소주의와는 대조적으로 헬스 열풍 등 건강한 삶에 대한 추구로 대표되는 이른바 ‘긍정적 사고’에 대한 찬미 또한 목격되지만, 나는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력을 위해서 넘어야 할 큰 산이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그 본질은 건전해 보이는 것과 달리, 사실 정신승리 내지는 나르시시즘의 발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긍정적 사고의 주체는 오늘날 결코 “우린 잘 될거야”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직 ‘나’만 잘 되면 되기 때문이고 다른 사람은 알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뚤어진 ‘긍정적 사고’는 사실 ‘디스토피아’적 상상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강박적인 ‘디스토피아’에 대한 부정의 반대 면에는 사실 누구보다 더 굳게 디스토피아의 도래를 믿고 이에 적극적으로 순응하는 냉소적 주체가 있다. ‘긍정적 사고’는 결코 세계를 낙관하지 못하게 한다. 오히려 낙관은 체제에 대한 강력한 반-테제로서 ‘비판’이 있는 곳에서 가능하다.
내가 갓 성인이 되었을 때, 지금까지도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의 내한-강연에 간 적이 있다. 나는 얼마 모르는 영어단어로 그에게 냉소에 휩싸이지 않는 비결을 물었다. 그는 뜬금없이 ‘사랑’이 가득찬 삶을 살았기 때문에 본인이 늘 낙관적이고 희망이 있다고 답했다. 한동안 이해를 못했었고, 어느 순간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지만 도통 이를 언어로 표현할 재간이 없었는데 이 글을 통해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결국에 사랑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정강산. (2024). 자본주의 구조위기의 리비도 형세: ‘암울한 세대’ 너머의 감정사를 향하여. 문화과학, 117, 12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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