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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갈등 원인은 남성성의 위기 : 천정환 (2016), “강남역 살인사건부터 메갈리아 논쟁까지 페미니즘 봉기와 한국 남성성의 위기”, 『역사비평

by 양자역학이 좋아 2024. 7. 12.

  2010년대 중반 이후, 2030 사이에서 웹 상에서 가장 뜨거웠던 의제는 ‘페미니즘 리부트’와 그에 대한 반동이었다. 이로 말미암은 갈등을 일부 논객들은 '페미'과 '반페미'의 문제로, 태도의 문제로 다루는 경향이 있는데, 오히려 이는 젠더갈등의 문제이기에 그 구조적 원인을 탐구해야 해결의 실마리는 있를 찾을 수 있다. 
 
페미니즘 리부트는 정말로 여성만의 문제였는가?
  천정환 선생님의 논문은 2010년대 중반 젠더갈등이 첨예해지기 시작한 시점에 가장 빠르게 질문을 던졌고, 또 아직까지 유효한 답과 의문을 던진다고 생각한다. 벌써 과거의 논문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천정환 선생님이 진실로 그 당시 독자에게 던졌던 질문, '당사자가 아닌 남성들의 옳은 선택은 무엇인가?’에 대해 뚜렷한 답은 구하지 못했다. 남성들의 반응은 반작용, ‘자지랖’, 성찰과 친페미니즘으로 나타났다. ‘자지랖’은 주로 망신으로 끝났던 남성진보 인사들의 딴죽을 의하고, 성찰과 친페미니즘은 ‘저는 잠재적 가해자 입니다’라며 연대-주체로서 주체화하려는 반응이다.
  이러한 반응들은 단지 메갈리아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남성성의 위기에 따른 반응들이다. 보통의 2030 남성들의 피해의식은 학교에서 출발한다. 예전과 같은 남녀 차별이 사라진 학교에서는 여학생들이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기도 해왔다. 2000년대 초반 사법시험을 비롯해 고시 합격자 중 여성이 더 많은 수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는 그 이전 세대들에겐 없던 경험으로 뒤쳐진 남성들에겐 마치 자신의 자리를 앗긴 느낌이었을 것이다. 20대 초의 피징집은 사회적 성공에서 그들을 박탈시키는 경험이었을 것이고 ‘불공정한’ 대우를 받은 경험일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야기한 여성 노동력의 동원과 남성성의 위기
  논문에서 적시하듯 사실 ‘더치페이 발화’에서 사라진 것은 ‘가족 부양자 모델’에서 주체일 뿐 아니라 열정적, 낭만적 사랑의 주체다. 이는 능력주의와 결합한 평등주의로 신자유주의적인 것이 된다. 지리멸렬한 남성주체는 역설적으로 강렬한 신자유주의적 주체다. 남성성의 위기는 자본주의 구조의 변화와 함께 분석되어야 한다. 70년대 후반부터 지속되어 온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대응은 산업적인 측면에서 두 가지 점을 주목해야 한다. 전통적인 포드주의 제조업에서 지식정보산업으로 선진경제의 산업구조 변화와 더불어, 80년대 후반부터 잇달아 닥쳐온 노동유연화로 여성노동력 또한 산업예비군의 대열에 합류했다. 여성노동력의 등장은 교육 여건 개선이 원인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에 의한 ‘가족’에 닥친 실질임금 하락과 그에 뒤 따른 곤란에 의한 것이다.
  기존의 가족 부양자 모델은 신자유주의의 결과로 지속 불가능해졌고 그에 따라 경쟁이 심화되면서 능력주의와 평등주의에 대한 추종이 잇달았다. 회사는 제조업 중심의 경제에서 지식정보산업으로 흘러가면서 이제 더 이상 남성에게만 일자리를 줄 이유가 없었다. 여성도 노동력 풀에 합류하였고 수요의 증가보다 공급의 증가가 현저히 컸기에 임금은 당연히 줄어들었다. 따라서 여성도 이제 남편에게 경제력을 의존할 수 없게 되었고, 남성 또한 아내에게 노동할 것을 기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젠더갈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국민경제 차원에서의 합리성과 다르게 개인 차원에서의 합리성의 부재에 따라 반동적으로 나타났다. 출산 및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여성들에 대한 불만이나 그 이후에 숙련된 여성노동력의 경력단절 등 개별 기업, 또는 개인의 차원의 합리성이 모여 전체 차원에서는 부당한 결과를 낳고 있다. 자본주의 황금기에나 가능했던 가부장제는 진작 파산했음에도 불구하고 껍데기가 신자유주의 체제와 결합하여 그 일부로서 여전히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목적없는 선언의 한계. 이제 대안을 묻자!
  페미니즘 리부트는 그 가부장제의 잔재에 대한 여성들의 불만에서 동력을 얻었고, 일정 부분 여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차별과 두려움에 의한 공포를 대화할 수 있게 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직장내 성희롱 등에 대해서도 규제가 되고 있고, 성폭력에 대해서도 중대범죄로 인식하게 되는 성과도 있었다. 다만, 성과에도 불구하고 시작부터 그 한계도 존재했다.
  웹 상에서 진행됐다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계몽주의 운동 역시 근대 혁명을 이끄는 데 있어서 큰 기여를 하지 않았는가? 웹 상에서 자행되는 언어적 폭력은 운동의 장소가 웹 상에서 이뤄진 이상 어쩔 수 없다. 19C 좌파들의 글도 날 선 비판과 조롱, 반대 편이 보기에 추한 표현도 많았다. 그러한 비판은 인터넷 커뮤니티 전반 내지는 극단적 성향의 스피커만 살아남는 신문, TV 등 전통적인 대중매체 및 유튜브를 비롯한 SNS 전반에 두루 해당되는 비판이기에 논하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일하게 웹 상에서 이뤄진 활동이기에, 페미니즘 리부트는 ‘서비스 산업 종사(예정)의 젊은 여성’이 과잉대표 되는, 폐쇄적인 여성조합주의의, 가장 중요하게는 목적 없는 운동이었다는 한계는 존재하다. 강남역, 혜화역 등 오프라인에서 목소리를 내오는 ‘선언’들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제’를 실질적으로 타격하지는 못했다는 의미다. 가부장제는 독립된 실재가 아닌 신자유주의에 기생하기에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만으론 효과가 없다. 여성의 지위 향상이나 성평등 달성에는 일부 성과는 있었을지 몰라도 가부장제와 진정으로 양립불가능한 의제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오히려 숱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한계로 남는 것은 대안이 없었다는 점이다. 대안이 없는 목적 없는 운동의 한계는, 어쩌면 현재의 2030이 과거 세대보다 더욱 더 가부장제의 불가능성을 붙잡고 욕망하게 만들었다. 소위 ‘이대남’들은 여성가족부를 폐지하자는 일말의 실현 가능성도 없는 공약에 열광하고, 반대편의 ‘이대녀’들은 ‘대인배', '상남자’ 따위의 진부한 가부장적 남성상에 이어 "알파메일”에 열광한다. 그와 동시에 이뤄지는 독신적 삶에 대한 찬미로 대표되는 만연한 나르시시즘과 극단적인 출생율 감소는 우리 사회가 재생산의 위기에 닥쳤음을 보여준다. 유력한 대안은 이민인 듯 보이고 기성세대는 오히려 비경제인구 감소에 아무 문제 없을 거라며 호언장담하는 기성세대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고도로 근대화된 사회가 구조적 위기를 겪을 때 진보적 대안이 없을 때, 그 틈새에서 극우주의가 부상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진부한 이야기일지는 몰라도, 다 갖춘 '육각형 인간' 내지는 '알파메일'이나 '백마탄 왕자님' 스토리가 현실의 욕망보다 더욱 과장된 욕망을 대변하는 현 시대에, 오히려 근래에 본 한국 TV 멜로 드라마 중에서는 가장 볼만하다고 느꼈다. 드라마 <봄밤> (2019)

  거의 10년이 다 되가는 지금도 처음 이 글을 읽었을 때 천정환 선생님이 던진 질문은 미완으로 남아있다.

"당사자 운동으로서의 여성주의 운동에 대해 ‘남성’이 발언권이 있는지, 또는 여성들이 벌이는 이 싸움이 피치 못할 정체성의 차이를 지닌 주체 간의 ‘연대’의 문제인지,아니면 남성들이 괜한 오지랖(자지랖)을 발하거나 '맨스플레인’ 하는 위험을 피해 ‘아닥’하고,여성들의 입장과 호소에 마음을 열고 경청하되 ‘당사자’들에게 맡기는 편이 나은지, 또는 아니면 어차피 자고동서로 페미니즘도 한 갈래가 아니니 각자의 '여성운동’ 혹은 성해방 운동을 하면 되는지? 남성의 위치는 혼란스럽다.”

 
  그렇지만 10년 동안 더욱 더 진정한 대안이 필요한 시대라는 것은 분명해졌고, 우리는 10년 전보다 더욱 더 간절하게 에로스의 귀환을 꿈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