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수전 니먼
- 출판
- 생각의힘
- 출판일
- 2024.04.25
최근 디즈니 실사화 영화들이 개봉하면 꼭 “원작의 감동을 과도한 PC주의가 망가트렸다”는 평을 많이 보인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자체가 진짜 원작의 잔혹한 메시지를 과도한 상업성으로 덮어버린 건 왜 애써 무시하는지 모르겠으나, 우리가 정치적 올바름의 과잉 속에서 사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그냥 ‘배우의 외모가 맘에 안 든다’는 말을, 깊게 고민해본 적도 없는 ‘PC주의’가 과도하다고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말하는 것이냐는 말이다.
‘과도한 PC주의’를 정말로 비판하고 싶다면, 이 책을 읽으면 할 수 있다. 미국의 좌파 도덕철학자 수전 니먼은 전통 ‘좌파’의 이름으로 리버럴들을 비판한다. 사회적 불평등에는 오랫동안 눈 감으면서, 정체성 정치와 손잡고 차별을 철폐하는 ‘진보하는’ 이미지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니먼의 주된 비판대상은 포스트모던 담론과 그에 뒤 따르는 정체성 정치의 ‘부족주의’다. 계몽주의의 보편주의를 그저 ‘서구 부르주아 계급 남성 식민주의자’의 이론이라며 폄하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계몽주의는 서구중심주의의 첫 비판자였고, 그 가장 큰 미덕은 부당한 차별에 대해 보편적 이성의 이름으로 맞서는 것이었는데, 이에 대해 일방적인 비난은 무용하다는 것이다. 또한 니먼은 정체성 정치는 여러 정체성 중 하나로 모든 것을 바라보려는 시도로, 그 정체성으로 인해 다른 정체성을 가진 이들과 근본적인 차이가 생긴다고 주장하며, 결국 고통을 호소할 뿐 아무런 극복도 할 수 없는 부족주의라고 비판한다.
아도르노, 푸코, 칼 슈미트와 같은 이들을 추종하는 미국 학계에 대한 비판도 통렬하다. (아도르노는 다른 책에서 논했기에 깊게 언급되지 않는다.) 푸코의 근대성은 감옥일 뿐이었다며 아무런 진보도 없다는 식의 계보학적 접근은 그 철학이 빈곤하고 반동적이라면서, 칼 슈미트는 세련된 권위주의자일 뿐 진지하게 논의될 대상이 아니고 결국은 ‘힘’밖에 없다는 패도적 세계관의 반복이라고 비판한다.
저자의 주장에 공감은 하지만, 마냥 동의만 하기는 좀 어렵다. 차별에 대하여 보편주의의 입장에서 말할 수 있게 되어야 서로 대화가 가능한 것은 맞고, 그것이 규범을 합리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원천이라는 데에는 공감한다. 정체성 정치가 근대성에 대해 취하는 전면적인 부정의 입장들에 대한 지적에 대해서도 동의한다. 탈식민주의로는 피식민지의 근대성에 대해 한마디도 할 수 없다. 적어도 동일한 수준의 범주로 올려놔야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 피식민지를 근대의 언어로 되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정체성 정치의 전략이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아래는 대략적인 이해에 불과함을 참고해달라. 소수자의 ‘은폐된 목소리’는 역사적으로 형성된다. 스스로를 보편으로 강하게 믿고 있는 근대의 권위는 타자화된 소수자의 ‘시각’을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그것이 기존의 보편적 범주로 포착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보편적 범주에 편입되기 위해 제시되는 더욱 엄격한 기준에 부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반면, 근대 초기의 선입견 중 일부는 아무렇지 않게 보편적 범주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하여 포스트 이론은 기존 근대의 보편성과 합리성의 범주를 해체하고자 한다. 기존의 범주를 탈구축하여 그 범주의 재구축을 의도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가 비판하는 부족주의적 접근은 정당화된다. 지금의 보편적 범주에 대항하는 담론은 보편적 범주의 모순이 아닌, 특권화된 경험을 정당화하기 위해 ‘힘’으로서 해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마 ‘말’은 권력이라는 푸코와 같은 이들이 인기 있는 사상가가 된 배경일 테다.
여기서 정체성 정치의 딜레마가 생긴다. 보편적 주체로의 정당성을 확보하지 않는다. 특정 정체성의 외부와 구별되는 경험을 특권화시키는 방향으로는, 결코 그 정체성 외부의 사람과 동일한 보편적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런데 그 경험을 특권화 시키지 않으면 일반법칙에 의해서는 증명되기 어려운 불이익을 겪게 된다. 모순되는 말이지만, 증명이 잘 되지 않는다고 그들이 겪는 불이익이 없진 않기 때문이다.
정체성 정치가 성장할 수 있는 배경에는 보편적 비전의 부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의외로 포스트 이론을 가장 잘 활용하는 사람들은 정체성정치가 아닌 반대편의 대안우파들인데, 그들은 대중의 일부를 부족으로 편성하고 그들의 목소리로 현실에 구축된 근대적 합의를 해체하는데 능하다. 차별과 불평등에 맞서는 연대는 보편적 의제 없는 일시적 연합 정도로는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해답은 다시금 보편의 주체로 스스로를 선언하고 이를 바로잡는 데에 있다. 이론가가 아닌 대중을 상대로 보편을 선언하고 싶다면, 보편적 권리의 선언을 넘어 그 구체성의 실현에서 특수성을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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